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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태극기
① 최초의 태극기 1882년 9월 박영효를 대표로 한 수신사 일행이 일본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우리나라 태극기는 1882년 10월 2일자 일본 동경발행 「시사신보」에 소개되었으면 그 소개되었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최초의 태극기에 대해서 알수 있다. 맨위에「조선국기」라는 캡션과 함께 4괘 안에 음(청) 양(적)의 위치를 지정한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고, 최초의 태극기 4괘는 현재의 태극기와는 달리「손」「간」「진」「이」가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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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가 일본 수신사로 떠나는 박영효에게 태극기의 도안, 재질, 도형의 설명, 그리는 방법까지도 직접 언급하고 지시하였고, 박영효는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박영효의 일기[使和記略](新製國旗縣寓樓旗等白質而從方長不及廣五分之二主心畵太極塡而靑紅四隔畵四卦會有受命於上也)에 기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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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최초의 태극기를 컬러화한 모습 1882년에 사용된 우리나라 최초의 태극기를 컬러로 복원한 화면이다. 국기는 나라를 상징한다. 우리나라는 이 태극기를 사용하기 전에는 전혀 국기라고 할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쇄국정책을 펴오던 우리나라도 결국에는 일본, 미국,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등 여러 선진화된 나라와 통상조약을 맺지 않을수 없었고, 이러한 때에 나라를 대표할만한 국기는 꼭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필요속에서 탄생된것이 태극기이며, 태극기는 우리나라만의 특성을 갖는 고유의 표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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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최초의 태극기 모습은? 최초 태극기의 형태와 재질은 사각형의 옥색 바탕이었다. 태극 도형은 원을 수직으로 나누어 머리 부분이 우측에서 좌측으로 회전을 시도한 부분을 홍색 칠하고 좌측에서 우측으로 회전을 시도한 부분을 청색 칠하여 두 극이 좌우 대칭 되도록 하였다. 이 모습은 마치 팔짱을 깊게 끼고 돌아가는 형상과도 같아 보인다. 두 극의 머리는 굵고 반면에 몸통은 짧으나 회전을 시도하는 모습이 역동적이어서 마치 힘찬 회오리를 연상하게 하는 것으로 주역 등 어떠한 태극 도형과도 차별되도록 도안되었음을 한 눈에 알아 볼수가 있다. 최초 태극기의 4괘는 현재처럼 건(乾), 곤(坤), 감(坎), 이(離)가 아니고, 그림에서 보았듯이 손(巽), 간(艮), 진(震), 이(離)였다. 그러나 괘의 의미는 똑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고종황제는 최초의 태극기를 그릴 때 4괘의 의미를 동서남북이라고 분명히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바로「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4괘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라는 부분이다. 이렇듯 최초의 태극기는 고종 황제의 명에 의해 그 의미가 분명한 국기이며, 순간적으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것이 아닌 오랫동안의 연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알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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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작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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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운요호 사건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우리말로는 운양호)가 불법적으로 조선 영해에 침입해 온 사건이다. 일본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국력을 키운 뒤,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운요호를 보내어 강화도 부근까지 침입시키었다. 이를 발견한 초지진 포대에서 먼저 공격을 가하자 그들은 즉각 포격을 해 오더니, 영종도에 상륙하여 살인, 방화, 약탈을 마음대로 하였다. 우리의 수비 부대는 거대한 함포를 비룻한 발달된 무기를 갖춘 이들의 공격을 막아 내지 못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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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도에 상륙한 일본군은 곧 물러갔으나, 이를 빌미로 하여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을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한다. 운요호 사건 당시 운요호의 게양된 일본국기가 초지진 포대의 공격으로 불타버렸는데 이것을 가지고 일본의 국기를 게양했는데도 불구하고 먼저 공격한 사실에 대해서 속시원히 해명하라는 일본의 압박이 강화도 조약 당시 한몫을 했다. 우리 나라의 난처한 입장을 눈치챈 중국은 먼저 황준헌을 통하여「중국의 龍旗를 본받아 그려서 전국적으로 사용하라(襲用中國龍旗 爲全國徽章)」는 간섭을 하였다. 그 후 우리 나라와 중국은 국기 제정에 따른 양국 위원을 임명하였는데 우리측 위원은 이응준이었고, 중국측 위원은 마건충이었다. 하지만 국기 제정은 흐지부지해져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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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고종 황제의 창안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갔을 당시 일본발행 시사신보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원문)「又此흘朝鮮には國旗と云べきものなきに今度支那より來りさる馬建忠が朝鮮の國旗は支那に從ひ三角形の靑地に龍を書くべし本國支那は黃色を用るども朝鮮は支那の東方に當る邦たるを以て東は靑色を貴ぶの意により靑地を用ふべしと指示したるに國王は大に之を憤み決して支那の國旗に倣ふべからぬとして四角形の玉色地に太極の圖(二つ巴繪)を靑赤にて書き旗の四隅に東西南北の易卦を附けたるを自今朝鮮の國旗と定むる旨沙汰せられたりとあり」
(번역)「이때까지 조선에는 국기로 부를 만한 것이 없어 지난번에 탁지부를 방문한 중국의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는 중국의 국기를 본받아 삼각형의 청색바탕에 용을 그려야 하며, 본국인 중국은 황색을 사용하나 조선은 중국의 동방에 위치하는 나라이므로 동쪽은 청색을 귀히 여긴다는 뜻에 따라 청색바탕을 이용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이에 국왕은 분히 여겨 절대로 중국의 국기를 흉내내지 않겠다하여 사각형의 옥색바탕에 태극원(두개의 소용돌이 문양)을 청색과 적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4괘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을 하교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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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도 볼수 있듯이 국기 제정을 하는데 중국측 위원의 망언은 역시 자주 독립국가인 우리나라에 대한 모독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참지못한 고종 황제는 직접 나서서 국기를 제정한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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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박영호의 수신사 파견 국기 제정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박영효를 대표로 한 수신사 일행을 일본에 파견하게 되었고, 이때 박영효는 출발에 앞서 고종황제로부터 국기 제작에 대한 내략을 받았다. 일본 기선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동승한 수신사 일행, 영국 영사관 아스톤(W.G Aston), 선장 제임스(James) 등과 태극 8괘의 도안을 가지고 숙의한 끝에 최종적으로 4괘의 태극기를 국기로 결정 제작하였다. 이 태극기는 고베에 도착하였을 때 숙소 니시무라야(西村屋)의 옥상에 게양하였으며 이 사실을 기무처로 보고하였다. 고베 체류중 수신사 박영효가 본국에 보낸「송기무처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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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극 8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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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略)이미 각국과 더불어 통상수호한 후에는 사절을 파견할 때마다 예의상 국기가 없어서는 아니된다. 그리하여 각국의 항구에서 각국의 군함을 만나게 될 경우라면 육문 이상의 함재포를 가진 자는 반드시 축포의 예로 대하는 것이라, 이러할 때에는 각국의 사절들이 제각기 국기를 게양하여 서로 분별하는 법이요, 각국의 여러 가지 경축이 있을 때에도 국기를 달아서 서로 축하한 것이며 각국의 사절들이 회합을 할 때에도 국기로써 좌석의 차례를 표시하는 법이니 어느 나라든지 국기를 만들어 휴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 영국, 미국, 중국, 일본의 각국도 우리 국기를 그려 갔으니 이로써 널리 천하에 표명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박영효는 수신사 일행 활동 보고서와 일본 방문중 선상에서 만든 태극기 3개(대,중,소)중 작은 태극기를 동래부사를 통해 고종황제께 보고하였고, 10월 3일에는 동경에 도착하여 왕비(坤殿)생신 축하 연회 장소에서 다른 나라 국기와 함께 게양하기도 하였다. 박영효가 이렇게 수신사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 이듬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건의로 고종황제는 1883년 음력 1월 27일(양력 3. 6.화요일) 태극기를 정식 국기로 사용토록 전국에 공표 하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