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일을 회상하며/잃어버린역사를 생각하며

앞산의 안지랑이의 전설

평암 2006. 1. 14. 18:18

남구 대명 5동 일원에 펼쳐져 있다.
현재 위치는 대명 1동 복개도로에서 바로 올라간 곳이며 원래는 왕지렁이, 옛날 왕건(지렁이 아들 견휜을 피해)이 안지랑골에서 피신하다가 돌아갔다하여 나온 이름이라고도 한다.
후삼국 말엽에 고려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원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앞산 동북쪽으로 뻗어내린 골짜기에서 편안하게 안일하게 지내다가 돌아갔다 하여 안지랑으로 불리어 지금의 앞산 북동쪽 골짜기를 안지랑골로 명명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금부터 천여 년 전. 싸우다가 도망가던 고려의 왕건이 기진맥진한 채 비슬산 기슭에 이르러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시고 기운을 차렸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 바위가 대구 앞산 안지랑골에 있다.
약수터로 알려진 이곳의 이 전설은 거짓말인 것이 거의 분명한 것이 고려 군사가 대구 근방에서 싸운 것은 왕건과 견휜의 싸움뿐인데 이때 패주한 왕건은 비슬산 쪽으로 간 것이 아니고 경산쪽으로 갔다고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전설을 안고 있는 안지랑이 4,5십년 전에는 대구 제일의 여름 안식처였었다.
당시 그곳은 지금과 같이 메마르지 않고 산림이 울창했고 중턱에 있는 안일암과 더불어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대구 시민은 연중행사처럼 여름철이면 거기를 찾아 들었다. 광목이나 삼베로 개울에 천막을 치고 약수에 목욕을 하는 것이 시민의 그지없는 낙이었다.
더구나 엉성한 가설 천막사이로 벌거벗은 여인들이 물을 덮어쓰며 시원해 하는 광경들은 오랫동안 시민들 사이에 화제로 남아 있었다.
그때 시민들은 약수터에 가는 것을 일종의 레크리에이션인 동시에 운동하는 한 가지 방편라고 생각했다. 무더운 날이면 솥과 냄비와 반찬을 준비한 가족 야유회가 이곳을 중심으로 벌어진다. 좀 넉넉한 사람들은 산밑까지 마차를 타고 가기도 했다. 마차는 지금 대신동 파출소 있는 곳에서 출발했는데 전세와 합승마차(?)의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그러나 부자나 상급 관리들은 그 당시로는 최고급인 '하이야'를 타고 가기도 했다.
저녁 노을이 질 듯한 저녁 때가 되면 안지랑골 밑에 70여대의 마차가 줄을 지어서고 몇 대의 택시까지 끼어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이곳은 특히 가정 주부들이 좋아했던 곳인지 많은 여인들이 한둘 혹은 몇 사람이 어울려서 수십 명씩 모여 들었다. 그들은 가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안지랑골에서 물 맞고 오다가 길에서 소나기 맞고 집에 와서 남편한테 매 맞는다'는 말까지 떠돌았다.
해가 기울어지면 이 번잡한 야외 향연도 시들해지고 여기저기 노랫소리와 함께 술에 취하고 물에 취한 남녀들이 비틀거리며 내려온다. 특히 수십 명씩 떼를 지어나온 여인들이 장고를 치고 춤으로 너울거리면서 대명동 공동묘지 길을 넘어오는 광경은 기이했다. 여기저기 긴 그림자를 물고 솟은 무덤 사이로 흥겨워서 노래를 부르며 비틀거리는 여자들의 모습은 인생무상을 그대로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약수터는 이곳 뿐 아니라 영천의 황토물터, 가창의 약수터, 칠곡의 나박탕 등이 인기가 있었다. 특히 옥포 용연사 약수터는 제일 인기가 있었다. 이곳은 일인이 관리를 하고 있어 막대한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 일인은 지독한 구두쇠라 한푼도 에누리를 하지 않았다는데 한국 땅에서 나오는 한국인의 물을 왜놈이 돈받고 판다고 해서 비난이 높았다. 마침내 그런 꼴을 보고 있던 그 왜인의 사용인이었던 한 한국청년이 그 자를 찔러 죽여버렸다. 일본 경찰은 이 민족적 살인범을 찾으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찾지 못하고 말았다. 그 용감한 청년은 오늘날까지 이름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일본의 억압과 학대 속에서도 대구 시민은 이런 약수터를 그들의 유일한 휴양처로 삼고 즐겨 왔다.

 

대구시사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