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일을 회상하며/잃어버린역사를 생각하며

피골의 전설(충북 영동).. 서동요에서 성왕이 죽은곳...

평암 2006. 1. 14. 18:00
피골의전설
충북 영동군 영동에서 북쪽으로 약 7km 떨어진 심천면 각계(覺溪) 2구 직동을 핏골이라 불러 오고 있는데 이 핏골은 옛날에 혈곡(血谷)이라 써오던 때도 있어서 이름만으로 전쟁의 흔적을 짚어 알 수 있는 곳이다.
핏골은 금강 상류인 초강(草江)이 가까운 곳에 흐르고 있기도 하려니와 마을이 온통 국방상 중요한 산으로 에워싸여 언듯 보기에도 군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더듬어 알 수 있다.
금강과 인접된 산들을 끼고 오랜 옛날 신라 백제는 충돌이 그칠 날이 없었다.
핏골의 전설은 옥천군의 격전지인 구진베루의 지명 전설과 유사하지만 이 고장 사람들은 백제 성왕(聖王)의 사절지(사절지: 절개를 위해 죽은 땅)를 이 핏골로 이야기해 오고 있어 흥미를 돋구고 있다.
서기 533년(백제 제 25대 성왕10년) 7월의 어느날 밤 생긴 일이었다. 어느날 일관(日官: 임금님께 좋은 일 나쁜일을 전하는 점쟁이)은 숨이 턱에 차서 임금 앞으로 다가왔다. 성왕은 벌써 일관의 얼굴을 보고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짐작했다.
일관은 고개를 들어 동쪽 하늘을 가리켰다. 왕의 옆에는 왕비와 공주가 나와 있었다. 그들은 일관이 가리키는 대로 동쪽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그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동쪽 하늘에서 별이 비오듯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왕은 급히 일관에게 물었다. 「저것은 무슨 징조인가」 「예, 이곳 웅진(熊津)의 땅 기운이 쇠퇴하여 하늘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중이다」 라고 대답했다. 왕은 그 순간 눈을 감고 실연에 잠겨 있었다. 웅진성(熊津城)의 땅 기운이 쇠퇴하다니 그렇다면 우리 백제는 위태롭게 되었단 말인가...... 문주왕 (文周王) 당시의 위례성(慰禮城)에서 이곳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지 겨우 60년도 아니되어 서울이 쇠 하다니 실로 가슴아픈 일이었다.
성왕의 부왕대(父王代: 왕의 아버지)에는 백성들이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9백여 호나 신라로 도망가더니 끝내 백제는 일관의 말대로 쇠하고 말것인가. 3년전에는 고구려에서 기마병 3만명이 백제를 기습해 오는가 하면 인접해 있는 신라 고구려 양국 침략에 대비 해온 백제에서는 국력을 기울여 이를 방어해야 할 어려움이 계속되어 왔다. 더군다나 국내에서는 매년 흉년이 들거나 흉칙한 소문들 뿐이어서 백성들이 하루도 마음 편하게 살 수가 없었다.
얼마 뒤 일관은 또 다시 임금님 앞으로 달려 왔다. 서기 535년 (성왕 12년) 4월의 어느날 밤이었다. 일관의 얼굴을 보니 무엇인가 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일관은 또 다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에서는 별이 어느 별을 범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화성(火星)이 북두성 반대편에 있는 남두성(南斗城)을 범하였던 것이다. 화성이 나타난 것은 백제 땅에 천재지변이 일어난다는 예보였다. 난리나 천재지변을 미리 예방하려면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새로 정하여 하느님께 국태민안을 비는 길 밖에 없다고 하였다.
성왕은 이 문제를 스스로 정하기가 어려워 일관과 좌평(장관)들에게 물었는데 그들은 하나 같이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새로 지을 것을 건의하였다. 성왕은 이듬 해 봄 도읍을 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부르기로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나라의 병란은 그칠 사이가 없었고 신라와 고구려의 위협은 날로 심해가고 있었다. 마침내 서기 554년(성왕 31년)10월 허약할 대로 허약해진 백제는 나라의 위험을 덜어 보려고 공주를 신라왕의 첩으로 들여 보내기까지 하였다.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왕의 딸을 첩으로 맞은 뒤에도 계속 영토 확장을 계획하였다. 신라왕은 지금의 경주에 새로운 주(州)를 설치하고 김무력(金武力)을 성주(城主)로 임명했다. 백제의 왕은 자신의 계략이 빗나간 것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랑하는 공주를 적의 국왕의 첩으로 들여 보낸 그 창피한 일을 하고난 뒤에 신라는 백제의 약점을 이용하기라도 하듯 백제의 국경지대에다 새로운 주를 설치하여 계속 영토 확장을 기도하지 않는가? 백제왕은 신라의 멸시와 굴욕적인 처사에 더 이상 참지를 못하여 왕은 즉시 어명을 내려 신라의 정벌의 길에 올랐다.
날센 기마병50명 병사 3만을 동원하여 왕 자신을 포함한 좌평(장관)급 여섯이 모두 전선으로 달렸다. 백제로서는 국운을 걸고 싸우는 큰싸움이였다. 성왕은 장군 가량을 앞세워 관산성으로 쳐들어 갔다. 이곳에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백제군의 사기가 워낙 강하여 신라는 뒤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신라는 김무력의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백제 신라 두나라는 지금의 옥천 영동 군경계인 금강 상류에서 피나는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전세는 날이 갈수록 백제군에 불리하였다. 성왕 자신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백제군은 신라군의 화살과 휘두르는 창과 칼날 아래 무참하게 죽어갔다. 급기야 성왕은 옥천에서 영동으로 쫒기는 몸이 되었고 여섯의 좌평중 네명도 목숨을 잃는 뒤였다.
백제 성왕은 적이 휘두른 칼날에 끝내 목숨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백제는 이 싸움에서 좌평 네명과 병사이만 구천 육백 명을 잃었으니 금강 일대와 주변의 벌판은 피로 물들어졌을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금강의 푸른 물까지 붉은 피로 물들였던 그 싸움에서 심천면 각계리 직동(稷洞)은 가장 심한 접선지여서 후세 사람들은 그 싸움이 있었던 이래로 핏골이라 불러 왔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