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역사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 망국의 회한을 노래한 길재의 유명한 시조다. 왕조의 몰락은 애조를 자아낸다.
당나라 두보의 시 ‘춘망’의 첫 구절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도 같은 감정대일 것인데....
나라가 망하니 산과 강물만 있고
성안의 봄에는 풀과 나무만 깊어 있구나.
시절을 애상히 여기니 꽃까지 눈물을 흘리게 하고,,,
하지만 역사는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끊임없는 물결인 것을.
왕정에서 민주로의 이행은 자유의 확대과정이다. 몰락한 왕조의 왕들은 뒤안길로 사라졌다.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황제’로 널리 알려진 청나라의 푸이(溥儀)는 중국 근현대사의 격랑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3살의 나이에 황제가 됐고,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 황제를 거쳐 식물원 정원사로 생을 마쳤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황제에서 시민으로’의 인생유전이었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도 가족과 함께 볼셰비키에 의해 총살됐다. 이들 일가는 처형된 지 80년 만에 로마노프 왕가 묘역에 안장될 수 있었다.
조선조의 몰락은 이민족에 의한 국권상실이어서 민족사에 씻지 못할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나라 잃은 백성들의 고통은 크기만 했다. 고종의 자녀들로 순종은 마지막 왕으로 기록돼야 했고, 고종이 늦게 얻은 딸이라 애지중지한 덕혜옹주의 삶도 비극적이었다.
영친왕이나 의친왕의 삶도 고단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만 특히 독립운동을 하신 의친왕의 딸로 미국에 거주하는 이해경 종현께서는 ‘천형과도 같은 왕족의 삶’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의친왕 전하을 잠깐 소개 하고자 한다.
호 만오(晩悟). 초명 평길(平吉). 이름 이강(李堈). 고종의 둘째 아들. 어머니는 귀인(貴人) 장씨(張氏). 1891년(고종 28) 의화군(義和君)에 봉해지고, 1894년 보빙대사(報聘大使)로 도일하여 청일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고, 이듬해 6개국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했다.
1899년(광무 3) 미국에 유학, 의친왕에 봉해졌으며 귀국하여 적십자사 총재가 되고, 1919년 대동단(大同團)의 최익환(崔益煥) 등과 협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탈출을 기도, 만주 안둥[安東]에서 발각, 송환되었다. 그 뒤 여러 번 일본 정부로부터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하고 끝까지 배일(排日)정신을 지켰다.
1919년 11월 대동단(단장 전협)이 주동이 되어 고종의 아들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상하이[上海]로 망명하게 하여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도자로 추대하려다가 랴오닝성[遼寧省] 안둥[安東:현 단둥]에서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어 간부 전원이 체포되었다. 이때부터 의친왕 전하의 고난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의 이야기를 좀더 해보겠다.
일본이 제국주의의 강제 병탐 후 중국에 망명한 지사들은 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 망명정부 세울 궁리를 했다. 이상설 신규식 박은식 등은 신한혁명당을 만들고 민족을 구심시키려면 고종황제를 망명시켜 받들어야 한다고 보고 당의 외교부장인 성낙형을 국내에 침투시켰으나 활동 중 발각되고 말았다.
하지만 고종이 아니더라도 왕의 누군가를 받들어 민족 구심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1910년대 독립운동의 특색이었다.
그 두번째 시도가 고종황제의 둘째 왕자요 순종황제의 아우인 의친왕 이강을 상해로 탈출시켜 옹립하려는 대동단 사건이다.
삼일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11월 10일 아침 당시 조선총독부 고위 경찰간부인 지바가 조선 귀족 감시를 맡고있는 사복경찰관들을 모아놓고 일장 훈시를 하고 있는데 제3부 경위반주임이 다가와 귓속말로 정보를 전했다.
어제밤 의친왕 이강전하가 궁을 탈출한 혐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밤 10시쯤 전하가 살고있는 저택의 후문 경계를 맡고있는 시시라는 형사가 키가 큰 두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중 하나가 전하만 같아 미행을 했는데 이문안 명월관 지점께서 놓쳤다는 것이었다.
지바는 그 두사람 가운데 하나가 전하인가 아닌가를 확인하러 든것이다. 경위하나를 보내어 왕족 감시 담당관인 이왕직의 구로사끼 사무관에게 전하가 집에 계시는지 여부를 확인시켰다. 구로시와는 직접 찾아가 비전하를 뵙고 물었더니 아무 일없이 계신다는 말을 들었고 행여나하여 내시를 시켜 결재서류를 들려보냈더니 결재를 다음으로 미루셨다는 것이었다.
이에 결재를 미룬것이 전하가 직접 나타나 한말인가 가운데 전한 말인가를 확인했더니 후자라는것이었다.곧 전하를 직접 본것은 아니었음을 확인한것이다. 전하가 상해에 탈출하여 독립세력에게 업힐것이라는 정보가 있던 때였는지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하를 직접 뵙고 오도록 사무관을 시켰다.비 전하를 맞나 전하를 꼭 뵙게 해달라고 조르자 실토를 했다.
「실은 어제밤 전하는 집을 나가셨다」고 .중대사건이 벌어지고만 것이다.즉시 경무국장으로 하여금 조선 전국은 물론 일본 만주 시베리아 상해에까지 수색 수배령을 내리게 했다.
이 탈출 당시상황을 회고하는 의친왕 김(김수덕)비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의친왕은 사동궁에 살았는데 사무관이 와 묻길래 낮 12시까지 낮잠 자고 계시다고 사무관을 속이므로서 탈출을 공모했다고 했다.
이 와중에 명월관 지점 주인 황원균이라는 자가 경찰에 출두 기생들로부터 이강전하의 행방을 찾고있다는 소문을듣고 집히는것이 있어 찾아왔다면서 어제밤 전하는 명월관까지 왔다가 인력거를 타고 어데론지 갔다는 것이었다. 그 인력거 인부를 찾아 취조하니 골평동 빈집잎에서 내려들였다는것이었다.
그 빈집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고있는 도중 만주 안동 지금 단동에서 경찰정보가 날라들었다.전하를 역에서 발견 모 숙소에 연금중이라는 것이었다. 연금까지의 탈출 전말은 이렇다. 일본 경찰의 수사로는 전하께서 전혀 탈출 의사가 없는 납치라는 쪽으로 몰아갔다.
전하가 돈에 궁한것을 안 전라남도의 한 부호가 남도에 있는 전하의 어장 어업권을 담보로 3만원을 빌려 드리겠다고 대리인이라는 이민하가 접근해왔다는것이다. 이에 전하는 그 돈을 받으러 김삼복이라는 종 하나만을 데리고 명월관을 거쳐 약속장소인 공평동 빈집으로 간것이다.
그 집에서 기다리고있던 이민하는 가방을 열어 백원뭉치를 보여드린 다음 지금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가셔야한다고 설득을 했다는것이다. 물론 그 돈뭉치는 백원짜리 한장만을 위에 얹은 신문오린 쪽지로 판명됐다는것이다.
그 순간 빈 집에 숨어있던 5∼6명의 청년이 권총을 들고 포위 상해행을 강요했다는것이다.이상은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통치비화」중 당시 고위 수사 책임자들의 비화에서 추린것이다. 실은 어장 담보를 구실로 접근 상해 탈출을 모의하여 실천을 약속하는 날에 공평동 빈집에서 만나 5∼6명의 단원에게 경호되어 세검정 고개를 넘어 수색역에서 만주행 기차를 탄 것이다.
바로 이민하가 전하를 상해에 모셔다가 망명정부를 세우려던 행동대인 대동단의 우두머리 전협이다. 사실대로 전하가 탈출을 시도한것으로 수사가 진행되면 전하를 감금 법정에 세우지않을수 없게되고 그렇지않아도 31운동으로 민심이 사나워져 있는 당시 정국을 악화시키는 악재로 작용할것이 뻔하다.
거기에다 중국에 왕족을 받든 망명정부가 계획되어 진행되고있음을 국민이 알면 민심이 그리로 쏠릴것이 자명한 일이기에 탈출이 아니라 납치쪽으로 몰아갔었수 밖에 없었음직하다.
망국의 백성들은 그 왕조에 대한 동정과 향수가 남다르게 마련이다.「이강 전하가 손수 고르셔 신고 계시는 만월표 고무신」이며 「이강 전하께서 손수 틀어 육자배기를 들으신 축음기」 하는 식으로 광고문구에 전하가 자주 등장하는것을 보면 백성 심정속의 위상을 미루어 잡아볼수가 있다.
그런 전하를 법정에 세워 재판한다는 정치적 무모를 저지를만큼 일본제국주의자는 무지하지않았다. 돌아온 이강전하를 여염의 살던 집에 두어두면 언제 탈출할지 모르는 일이라 삼엄한 경게하에 연금시킬 궁리를 했다.
바로 총독관저 구내에 있는 녹천정이라는 작은 집이 있었다. 이또가 술잔치를 즐겨 벌렸던 집으로 당시는 비어있었다. 여기에 연금시켰다가 일본으로 이주시킬 작정으로 모든 공작을 진행했다. 하지만 전하가 끝내 거절하여 일본행은 좌절되고 말았다고 당시 신문이 보도하고 있다.
이 의친왕의 탈출 미수가 김비의 가슴에 박힌 첫째 못이요 붙들려온 의친왕은 일본에의 증오심으로 성격이 광폭해졌으며 그 광폭을 정숙과 인내로 잠재워 내린 김비의 시중은 왕실의 부덕으로 구전돼 내리고 있다한다.
이강전하의 생모인 장귀인은 이은 전하의 생모인 엄귀인만큼 눈치가 빠르고 처신에 능하진 못했다. 두 분 다 귀인 시절에 고종의 사랑을 받고 민비의 가공할 질투를 받았는데 엄귀인은 그런 기미만 보이면 야음을 타고 아무도 모르는 여염에 숨어있기를 10여년하여 결국 을미사변으로 사랑을 쟁취하고만다.
이에 비해 장귀인은 낳은 아들과 더부러 궁밖에 쫓겨나 살다가 가진 혹독한 린치끝에 죽음을 당한다.
이강은 고아 신세가되어 민비의 박해로 끊임없는 생명의 위협속에 성장했으며 성장해서는 엄귀인과 그녀의 소생인 이복 아우 인 이은에 치어 유학이라는 미명으로 일본이나 미국에 가 고독한 젊음을 보내야만 했다.
미국에 유학했던 1903년 3월1일자 「뉴욕 헤럴드」지는 의친왕이 놀라운 성명을 했다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이 조선의 왕자는 미국 시민의 자유와 독립심에 매료되어 그의 국내외에서의 자유롭고 독자적인 활동을 위해 왕국의 왕관 계승권과 왕좌에 관련된 어떤 권한도 포기한다」고-.
이 신문 기사는 당시 의화군 곧 의친왕이 다니고있던 대학의 여자학부의 활달한 학생 앤지 글라함양과의 연문때문에 왕권 계승권리를 포기한것으로 추칙하고 있으나 이미 그때에는 엄비 소생의 영친왕 이은에게 후사없는 순종의 계승권이 건너뛰게 돼있었다.
고종을 닮아 무척 성격이 유약했던 그는 이와같은 고된 환경에 단련되어 성숙하질 못하고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며 자포자기끝에 주색에 깊이빠져 방탕무뢰하다는 말도 무척 들었다.
만약 장귀인에게 엄귀인(엄비)만한 총명함이 있고 조부가 보다 강한 성격과 소신의 소유자였던들 아버지가 왕통의 계승자는 못되었더라도 꽤 다른 양상이 벌어졌을 것이다.
평생 자신을 둔 주변의 불공평에 불평한 적이 없었으나 오로지 생모의 비참한 죽음에 대해서는 저녁 반주라도 할적에는 으례이 한탄하고 슬퍼하였다.
이처럼 의친왕 전하는 비극의 사람이었다. 광복후에도 의친왕의 비극은 멎질 않았다. 왕정복고를 두려워한 이승만 대통령의 왕실 재산 국유화와 왕족을 천대하는 바람에 정부를 원망하며 등지고 살아야했고 1.4후퇴때 부산에 내려가 돌봐주는 이 없어 먹는 끼니보다 굶는 끼니가 많아 결국 그때 얻은 영양실조로 돌아가시게 된것다.
500년 조선왕조를 지켜내고자 황실의 일원으로는 유일하게 독립운동을 하신 의친왕의 자제분들이 이곳 저곳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며 우리가 상상하지못할 정도의 처절한 삶과의 몸부림은 어떤 면에서는 거세게 출렁인 우리 근현대사의 상흔을 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조선왕조의 황실가족으로 백성들에게 비참하고 참담한 모습을 보이기 역겨워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미국땅으로 맨손으로 건너가, 독립운동하듯 처절한 삶과의 투쟁을 하시고 이제는 돌아와 열성조의 산능에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시는 의친왕 9남의 충길 황손이나 노래로 삶을 유지하여야 했던 이석 황손의 전주 정착은 우리의 굴곡진 과거를 한번쯤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수 있을 것 같다.
개인들의 삶을 지탱하는 터전인 사회와 나라의 안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눈길을 돌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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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리기문(효령대군=>영천군=>태강수=>응천부령.....17대손)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 망국의 회한을 노래한 길재의 유명한 시조다. 왕조의 몰락은 애조를 자아낸다.
당나라 두보의 시 ‘춘망’의 첫 구절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도 같은 감정대일 것인데....
나라가 망하니 산과 강물만 있고
성안의 봄에는 풀과 나무만 깊어 있구나.
시절을 애상히 여기니 꽃까지 눈물을 흘리게 하고,,,
하지만 역사는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끊임없는 물결인 것을.
왕정에서 민주로의 이행은 자유의 확대과정이다. 몰락한 왕조의 왕들은 뒤안길로 사라졌다.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황제’로 널리 알려진 청나라의 푸이(溥儀)는 중국 근현대사의 격랑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3살의 나이에 황제가 됐고,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 황제를 거쳐 식물원 정원사로 생을 마쳤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황제에서 시민으로’의 인생유전이었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도 가족과 함께 볼셰비키에 의해 총살됐다. 이들 일가는 처형된 지 80년 만에 로마노프 왕가 묘역에 안장될 수 있었다.
조선조의 몰락은 이민족에 의한 국권상실이어서 민족사에 씻지 못할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나라 잃은 백성들의 고통은 크기만 했다. 고종의 자녀들로 순종은 마지막 왕으로 기록돼야 했고, 고종이 늦게 얻은 딸이라 애지중지한 덕혜옹주의 삶도 비극적이었다.
영친왕이나 의친왕의 삶도 고단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만 특히 독립운동을 하신 의친왕의 딸로 미국에 거주하는 이해경 종현께서는 ‘천형과도 같은 왕족의 삶’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의친왕 전하을 잠깐 소개 하고자 한다.
호 만오(晩悟). 초명 평길(平吉). 이름 이강(李堈). 고종의 둘째 아들. 어머니는 귀인(貴人) 장씨(張氏). 1891년(고종 28) 의화군(義和君)에 봉해지고, 1894년 보빙대사(報聘大使)로 도일하여 청일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고, 이듬해 6개국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했다.
1899년(광무 3) 미국에 유학, 의친왕에 봉해졌으며 귀국하여 적십자사 총재가 되고, 1919년 대동단(大同團)의 최익환(崔益煥) 등과 협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탈출을 기도, 만주 안둥[安東]에서 발각, 송환되었다. 그 뒤 여러 번 일본 정부로부터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하고 끝까지 배일(排日)정신을 지켰다.
1919년 11월 대동단(단장 전협)이 주동이 되어 고종의 아들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상하이[上海]로 망명하게 하여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도자로 추대하려다가 랴오닝성[遼寧省] 안둥[安東:현 단둥]에서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어 간부 전원이 체포되었다. 이때부터 의친왕 전하의 고난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의 이야기를 좀더 해보겠다.
일본이 제국주의의 강제 병탐 후 중국에 망명한 지사들은 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 망명정부 세울 궁리를 했다. 이상설 신규식 박은식 등은 신한혁명당을 만들고 민족을 구심시키려면 고종황제를 망명시켜 받들어야 한다고 보고 당의 외교부장인 성낙형을 국내에 침투시켰으나 활동 중 발각되고 말았다.
하지만 고종이 아니더라도 왕의 누군가를 받들어 민족 구심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1910년대 독립운동의 특색이었다.
그 두번째 시도가 고종황제의 둘째 왕자요 순종황제의 아우인 의친왕 이강을 상해로 탈출시켜 옹립하려는 대동단 사건이다.
삼일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11월 10일 아침 당시 조선총독부 고위 경찰간부인 지바가 조선 귀족 감시를 맡고있는 사복경찰관들을 모아놓고 일장 훈시를 하고 있는데 제3부 경위반주임이 다가와 귓속말로 정보를 전했다.
어제밤 의친왕 이강전하가 궁을 탈출한 혐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밤 10시쯤 전하가 살고있는 저택의 후문 경계를 맡고있는 시시라는 형사가 키가 큰 두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중 하나가 전하만 같아 미행을 했는데 이문안 명월관 지점께서 놓쳤다는 것이었다.
지바는 그 두사람 가운데 하나가 전하인가 아닌가를 확인하러 든것이다. 경위하나를 보내어 왕족 감시 담당관인 이왕직의 구로사끼 사무관에게 전하가 집에 계시는지 여부를 확인시켰다. 구로시와는 직접 찾아가 비전하를 뵙고 물었더니 아무 일없이 계신다는 말을 들었고 행여나하여 내시를 시켜 결재서류를 들려보냈더니 결재를 다음으로 미루셨다는 것이었다.
이에 결재를 미룬것이 전하가 직접 나타나 한말인가 가운데 전한 말인가를 확인했더니 후자라는것이었다.곧 전하를 직접 본것은 아니었음을 확인한것이다. 전하가 상해에 탈출하여 독립세력에게 업힐것이라는 정보가 있던 때였는지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하를 직접 뵙고 오도록 사무관을 시켰다.비 전하를 맞나 전하를 꼭 뵙게 해달라고 조르자 실토를 했다.
「실은 어제밤 전하는 집을 나가셨다」고 .중대사건이 벌어지고만 것이다.즉시 경무국장으로 하여금 조선 전국은 물론 일본 만주 시베리아 상해에까지 수색 수배령을 내리게 했다.
이 탈출 당시상황을 회고하는 의친왕 김(김수덕)비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의친왕은 사동궁에 살았는데 사무관이 와 묻길래 낮 12시까지 낮잠 자고 계시다고 사무관을 속이므로서 탈출을 공모했다고 했다.
이 와중에 명월관 지점 주인 황원균이라는 자가 경찰에 출두 기생들로부터 이강전하의 행방을 찾고있다는 소문을듣고 집히는것이 있어 찾아왔다면서 어제밤 전하는 명월관까지 왔다가 인력거를 타고 어데론지 갔다는 것이었다. 그 인력거 인부를 찾아 취조하니 골평동 빈집잎에서 내려들였다는것이었다.
그 빈집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고있는 도중 만주 안동 지금 단동에서 경찰정보가 날라들었다.전하를 역에서 발견 모 숙소에 연금중이라는 것이었다. 연금까지의 탈출 전말은 이렇다. 일본 경찰의 수사로는 전하께서 전혀 탈출 의사가 없는 납치라는 쪽으로 몰아갔다.
전하가 돈에 궁한것을 안 전라남도의 한 부호가 남도에 있는 전하의 어장 어업권을 담보로 3만원을 빌려 드리겠다고 대리인이라는 이민하가 접근해왔다는것이다. 이에 전하는 그 돈을 받으러 김삼복이라는 종 하나만을 데리고 명월관을 거쳐 약속장소인 공평동 빈집으로 간것이다.
그 집에서 기다리고있던 이민하는 가방을 열어 백원뭉치를 보여드린 다음 지금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가셔야한다고 설득을 했다는것이다. 물론 그 돈뭉치는 백원짜리 한장만을 위에 얹은 신문오린 쪽지로 판명됐다는것이다.
그 순간 빈 집에 숨어있던 5∼6명의 청년이 권총을 들고 포위 상해행을 강요했다는것이다.이상은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통치비화」중 당시 고위 수사 책임자들의 비화에서 추린것이다. 실은 어장 담보를 구실로 접근 상해 탈출을 모의하여 실천을 약속하는 날에 공평동 빈집에서 만나 5∼6명의 단원에게 경호되어 세검정 고개를 넘어 수색역에서 만주행 기차를 탄 것이다.
바로 이민하가 전하를 상해에 모셔다가 망명정부를 세우려던 행동대인 대동단의 우두머리 전협이다. 사실대로 전하가 탈출을 시도한것으로 수사가 진행되면 전하를 감금 법정에 세우지않을수 없게되고 그렇지않아도 31운동으로 민심이 사나워져 있는 당시 정국을 악화시키는 악재로 작용할것이 뻔하다.
거기에다 중국에 왕족을 받든 망명정부가 계획되어 진행되고있음을 국민이 알면 민심이 그리로 쏠릴것이 자명한 일이기에 탈출이 아니라 납치쪽으로 몰아갔었수 밖에 없었음직하다.
망국의 백성들은 그 왕조에 대한 동정과 향수가 남다르게 마련이다.「이강 전하가 손수 고르셔 신고 계시는 만월표 고무신」이며 「이강 전하께서 손수 틀어 육자배기를 들으신 축음기」 하는 식으로 광고문구에 전하가 자주 등장하는것을 보면 백성 심정속의 위상을 미루어 잡아볼수가 있다.
그런 전하를 법정에 세워 재판한다는 정치적 무모를 저지를만큼 일본제국주의자는 무지하지않았다. 돌아온 이강전하를 여염의 살던 집에 두어두면 언제 탈출할지 모르는 일이라 삼엄한 경게하에 연금시킬 궁리를 했다.
바로 총독관저 구내에 있는 녹천정이라는 작은 집이 있었다. 이또가 술잔치를 즐겨 벌렸던 집으로 당시는 비어있었다. 여기에 연금시켰다가 일본으로 이주시킬 작정으로 모든 공작을 진행했다. 하지만 전하가 끝내 거절하여 일본행은 좌절되고 말았다고 당시 신문이 보도하고 있다.
이 의친왕의 탈출 미수가 김비의 가슴에 박힌 첫째 못이요 붙들려온 의친왕은 일본에의 증오심으로 성격이 광폭해졌으며 그 광폭을 정숙과 인내로 잠재워 내린 김비의 시중은 왕실의 부덕으로 구전돼 내리고 있다한다.
이강전하의 생모인 장귀인은 이은 전하의 생모인 엄귀인만큼 눈치가 빠르고 처신에 능하진 못했다. 두 분 다 귀인 시절에 고종의 사랑을 받고 민비의 가공할 질투를 받았는데 엄귀인은 그런 기미만 보이면 야음을 타고 아무도 모르는 여염에 숨어있기를 10여년하여 결국 을미사변으로 사랑을 쟁취하고만다.
이에 비해 장귀인은 낳은 아들과 더부러 궁밖에 쫓겨나 살다가 가진 혹독한 린치끝에 죽음을 당한다.
이강은 고아 신세가되어 민비의 박해로 끊임없는 생명의 위협속에 성장했으며 성장해서는 엄귀인과 그녀의 소생인 이복 아우 인 이은에 치어 유학이라는 미명으로 일본이나 미국에 가 고독한 젊음을 보내야만 했다.
미국에 유학했던 1903년 3월1일자 「뉴욕 헤럴드」지는 의친왕이 놀라운 성명을 했다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이 조선의 왕자는 미국 시민의 자유와 독립심에 매료되어 그의 국내외에서의 자유롭고 독자적인 활동을 위해 왕국의 왕관 계승권과 왕좌에 관련된 어떤 권한도 포기한다」고-.
이 신문 기사는 당시 의화군 곧 의친왕이 다니고있던 대학의 여자학부의 활달한 학생 앤지 글라함양과의 연문때문에 왕권 계승권리를 포기한것으로 추칙하고 있으나 이미 그때에는 엄비 소생의 영친왕 이은에게 후사없는 순종의 계승권이 건너뛰게 돼있었다.
고종을 닮아 무척 성격이 유약했던 그는 이와같은 고된 환경에 단련되어 성숙하질 못하고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며 자포자기끝에 주색에 깊이빠져 방탕무뢰하다는 말도 무척 들었다.
만약 장귀인에게 엄귀인(엄비)만한 총명함이 있고 조부가 보다 강한 성격과 소신의 소유자였던들 아버지가 왕통의 계승자는 못되었더라도 꽤 다른 양상이 벌어졌을 것이다.
평생 자신을 둔 주변의 불공평에 불평한 적이 없었으나 오로지 생모의 비참한 죽음에 대해서는 저녁 반주라도 할적에는 으례이 한탄하고 슬퍼하였다.
이처럼 의친왕 전하는 비극의 사람이었다. 광복후에도 의친왕의 비극은 멎질 않았다. 왕정복고를 두려워한 이승만 대통령의 왕실 재산 국유화와 왕족을 천대하는 바람에 정부를 원망하며 등지고 살아야했고 1.4후퇴때 부산에 내려가 돌봐주는 이 없어 먹는 끼니보다 굶는 끼니가 많아 결국 그때 얻은 영양실조로 돌아가시게 된것다.
500년 조선왕조를 지켜내고자 황실의 일원으로는 유일하게 독립운동을 하신 의친왕의 자제분들이 이곳 저곳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며 우리가 상상하지못할 정도의 처절한 삶과의 몸부림은 어떤 면에서는 거세게 출렁인 우리 근현대사의 상흔을 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조선왕조의 황실가족으로 백성들에게 비참하고 참담한 모습을 보이기 역겨워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미국땅으로 맨손으로 건너가, 독립운동하듯 처절한 삶과의 투쟁을 하시고 이제는 돌아와 열성조의 산능에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시는 의친왕 9남의 충길 황손이나 노래로 삶을 유지하여야 했던 이석 황손의 전주 정착은 우리의 굴곡진 과거를 한번쯤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수 있을 것 같다.
개인들의 삶을 지탱하는 터전인 사회와 나라의 안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눈길을 돌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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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리기문(효령대군=>영천군=>태강수=>응천부령.....17대손)
출처 : 전주이씨 전국 청.장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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