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무엇인가./역사의 진실은

[스크랩] 이몽룡의 아버지 성안의선생과 부용정 은행나무

평암 2017. 4. 3. 09:30

 

 부용정 내 큰 은행나무 누군가 심었을 것이 분명하나 알 수 없어 아쉽다.

 부용당 성안의(1561~1629)선생의  임란 창의 기념비 높은 벼슬도 했건만 '의병장 부용당'이라고만 명기해 겸손함이 돋보인다.

 한강 정구가 창녕현감재직시 지역의 문풍을 진작시키기 위해 지었다는 부용정 대구시 달성군과 경남 창녕군 경계지점에 있다.

 부용정 현판

 부용당선생의 영정각

 

현재 영정각에 있는 성안의 영정(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47호)은 이것이 아니고 모사품이다.

자료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몽룡의 아버지 성안의와 부용정 은행나무

 

몇 년 전 전라도 담양의 관방제림(천연기념물 제366호)을 보러 간일이 있었다. 조선 중기 담양부사였던 성이성(成以性, 1595~1664)이 제방을 쌓고 심은 나무들이 (사)<생명의 숲 국민운동>이 선발하는 ‘전국 아름다운 숲’ 대상에 뽑혔다는 기사를 보고서였다.

시간이 날 때 마다 노거수를 찾아나서는 나는 어린이날을 맞아 달성군 유가면 한정리의 500여 년 된 느티나무를 보고 달창지를 지나 가창으로 가기로 했다.

달창지의 동쪽 끝은 경상남도 창녕군 성산면 냉천리이다. 그 곳에는 고색창연한 정자 하나가 있다. 늘 그냥 지나쳐 어떤 분이 세운 정자인가 궁금했는데 이번에는 전에 보지 못했던 큰 비가까지 서 있어 차를 세웠다. 사진을 찍고 비문을 살펴보고 있는데 길가에 서 있던 한 아주머니가 정자안도 구경할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고맙게도 되돌아가 문을 열어주었다.

안에는 누군가 일부러 심었을 큰 은행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다. 심은 이가 누구인지 밝혀보는 것이 취미인데도 자료를 접할 수 없어 바라만 볼 뿐이었다.

부용정(芙蓉亭)은 1580년(선조 13)년 한강 정구선생이 창녕현감으로 와서 지역의 문풍을 진작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한강이 심었을 수도 있고, 임기를 마치고 갈 때 제자 중 가장 열성적으로 학문을 닦았던 성안의(成安義, 1561~1629)에게 물려주었다고 하니 그가 심었을 수도 있으나 이도저도 알 수 없음이 안타깝다. 부용당(芙蓉堂)은 정자를 물려받은 성안의의 아호이다.

 

그는 본관이 창녕으로 1561년(명종 16) 아버지 순릉참봉 성궤(成繢)와 어머니 장연노씨 사이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해 15세에 한강 문인이 되었다. 31세가 되던 1591년(선조 24) 대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러나 자리를 잡아 일을 하려는 즈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 부용정에서 창의하니 같이 공부하던 유생들은 물론 원근에서 1,000여 명이 모여 창녕에 주둔한 왜적을 3일 동안 전투 끝에 격퇴시켰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비변사에서 포상 어왜유장(禦倭儒將) 16인의 반열에 올랐다. 이어 다시 관계로 진출하여 형조좌랑, 사간원정원 등 내직을 거쳐 평안도 도사로 나아가 선정을 펼쳤다. 36세 때에는 영남 조도사(調度使)가 되어 명나라 군사들이 필요한 군량을 조달하는 임무를 원활히 수행하자 서애 유성룡선생이 선생의 재국(才局)을 극찬했다고 한다. 1600년(선조 33)그의 나이 40세 때 성균관 사성(司成)이 되었다가 영해부사로 나아갔다.

당시 경상좌도 감사 이시발(李時發, 1569~1626)은 선생을 포함하여 수령 13인을 모아 화산회(花山會) 결성하고 그 기념으로 화공을 시켜 각자의 초상화를 비단에 그리게 하여 소장토록 했다.

영해부사 재임 중 아버지가 병이 들자 고향으로 돌아와 수발하였으나 연이어 부모의 상을 당했다. 1607년(선조 40) 남원부사. 1612년(광해군 4)광주목사로 재임하든 중 정치적인 모략으로 파직 당했다. 영주로 돌아와 13년 동안 은거하며 정경세, 정온, 이준 등 당대 명사들과 교유하면서 후진 양성에 매달렸다. 인조가 즉위하자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성균관 사성, 상례원정, 봉상시정에 올랐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인조를 모시고 공주로 피란했다. 그 후 제주목사가 되었다가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68세가 되던 해 인조가 다시 우부승지로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아니하였다가 이듬해 1629년(인조 7) 69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1643년(인조 21) 이조판서 겸 홍문· 예문 양관의 대제학으로 추증되었다. 저서로<부용당선생일고>가 있으며, 연암 · 물계서원에 제향 되었다.

 

아들 성이성 역시 1627년(인조 5)대과해 급제해 정언, 진주부사 등 여러 벼슬을 거쳤다. 특히 담양부사 시절 관방제를 쌓고 나무를 심은 것이 오늘날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의 하나가 되었다. 그는 청백리로 호남 암행어사만 3번이나 수행했다. 최근 성이성을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의 실제인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두 남녀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이 실존한다는 것도 흥미롭지만 그의 아버지가 이 곳 대구 달창지 한 모퉁이에서 젊은 시절 인격을 도야하며 학문을 연마했다는 사실도 믿어지지 않는다.

또한 선생을 기리는 비문도 특이했다. 대다수 집안은 관료로 나아간 것과 벼슬 높은 것을 자랑하는 내용으로 쓰여 있다. 따라서 선생도 비록 증직이지만 ‘이조판서 겸 양관대제학’을 표기해도 무방할 터인데도 그런 상투적인 표현과 달리 ‘임란의병장 부용당’ 이라 명기(明記)해 선생의 많은 업적 중 유독 국난극복에 앞장섰던 일을 더 자랑으로 여기는 후손들의 겸손함이 돋보인다.

출처 : 나무이야기,꽃이야기
글쓴이 : 이팝나무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