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일을 회상하며/잃어버린역사를 생각하며

고구려 비운의 명장 "달가"

평암 2008. 2. 26. 20:30

비운의 고구려 명장 달가

서기 3세기는 고구려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다. 위나라 장군 관구검의 침략으로 한때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이 점령당하기도 하였으며, 그후로도 위나라와의 대립과 경쟁은 지속되었다.
특히 중천왕 12년 양맥의 골짜기에서 벌인 두나라의 전쟁은, 고구려의 운명을 판가름 하는 매우 중요한 전쟁터가 되었다. 더구나 양맥의 골짜기는 지난날 동천왕이 관구검과 싸워 1만 8천여명의 군사를 잃었던 아픈 기억이 있던 곳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천왕은 지난날의 패배를 교훈삼아 골짜기 양 옆에서 위나라 군사를 포위공격하여 무려 8000여 명을 참살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전쟁의 대승으로 인해 고구려와 위나라는 힘의 균형을 이루게 되었고, 위나라가 영토확장에서 통일정책으로 전환함에 따라 한동안 평화기간이 유지되었다.  하지만 위나라는 통일사업에 지나치게 많은 전력을 기울인 탓에, 북방유목민족의 움직임을 간과하고 말았다.


  이렇게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해 취약한 상태에서, 263년  촉나라를 멸망시키긴 하였으나, 265년 위나라도 사마씨가 세운 진(晉)나라 무제(武帝)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시기를 중국 서안의 洛陽(낙양)에 도읍하였다 하여 서진(西晉, 265~316)이라고 하는데, 서진은  280년 무렵 오나라도 멸망시킴으로써 중국의 삼국통일을 완수하였다.
 아무튼  서진이 중국을 통일함으로써 대륙정세는 안정되었지만, 역시 북방유목민족은 걷잡을 수 없이 강성해져 가기만 했다. 

   그리고 이러한 시기에 등장한 인물이 중천왕의 차남이자 서천왕(西川王)의 동생이었던 達賈(달가)였다.

 때는 서기 280년 서천왕 11년 음력 10월의 겨울이었다. 유목민족은 그 특성상 초목이 우거지는 여름에는 침입이 덜하였지만, 겨울이 시작되는 시기에는 식량의 확보등을 위해한 침탈이 극성을 부렸다.
 특히 이 해에는 숙신(肅愼)족이 변방을 침입해와, 식량등을 침탈함은 물론이고 백성들까지 마구 죽이는 만행을 일삼았다.

 그렇게 되자 서천왕은 "백성을 편안케 하지 못하고 위엄을 떨치지 못하여 이웃과 적국으로 하여금 강토를 침범케 하였다."고 자신을 책망하며 이 위기를 극복할 마땅한 장수를 천거케 하였다.
 그러자 신하들은 한결같이 서천왕의 아우였던 달가가 용맹과 지략을 함께 갖추었다며 천거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대장군이 된 달가는, 고구려 군단을 이끌고 숙신정벌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과연 달가는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연전연승하여 숙신족을 단로성(檀盧城)으로 몰아부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성곽의 공략은 단지 병력이 많음만을 믿고 무리하게 공략하다가는 오히려 피해한 커지고 실패하기 십상이다.
 삼국사기에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전략으로 이 성을 공략하였는지 나와있지는 않다. 단지 '기이한 꾀로써 엄습'하여 단로성을 빼앗았다고만 나와있다.

  이 한문장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현할 수는 없지만, 달기는 유인책을 써서 숙신의 주력군을 성박으로 끌어 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성이 비어 있는 틈을 타 엄습, 즉 야간기습작전으로 성을 점령한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별다른 피해없이 숙식족의 주둔지역을 점령하고 그 추장까지 사로잡은 달가는, 단호하게 추장을 참수하고   600호를 정리하여 부여 남쪽 오천지역에 옮겼다. 이어서 단로성 부변의 6~7개 부락도 전쟁한번 없이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서천왕은 크게 기뻐하며  공로로 달가를 안국공(安國公)으로 봉한후  내외병마사(內外兵馬事)를 겸해 양맥(梁貊)과 숙신의 여러 부락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비극은 서천왕의 아들인 봉상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시작되었다.

 기록에는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의심이 많다고 되어있어, 왕의 자질이 부족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그의 성품때문에, 왕 즉위초부터 백성과 신하들로부터 신망을 크게 잃어 버렸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봉상왕의 의심증은 나날이 더해갔고,  그 의심의 칼날은 안국공 달가에 미치게 되었다.

 달가는 앞서도 말하였지만 왕족의 한명이었고, 항렬상 숙부에 해당할 뿐 아니라 백성들과 대신들로부터도 크게 신망받고 있었다. 한마디로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최대의 정적임에는 분명하였다.
 결국 봉상왕(烽上王)은 재위 3년만인  292년, 계획적으로 안국군 달가를 살해하여 버렷다. 하지만 안국군 달가를 살해한 것은 봉상왕 최대의 실수였으며, 고구려로써는 위대한 장군을 잃는 크나큰 손실이 되었다.

 고구려 나라 사람들은 "안국군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양맥, 숙신의 난을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지금 그가 죽었으니 장차 누구에게 의탁할 것인가?'하고 눈물 흘리며 서로 조상치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달가를 살해하며 왕권을 유지하려 하였던 봉상왕이었지만, 재위 9년 동안 국가가 대기근이 든 상태에서 궁실공사를 강행하는 등의 실정을 거듭한 끝에, 서기 300년국상 창조리등에 의해 폐위되어 두 아들과 함께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