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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쳐/ KBS 영상실록
1945년 8월 15일. 그 날이 왔다..

해방은 뜻하지 않은 손님처럼 갑자기 찾아왔다.

그 날의 기쁨이 터져나온것은 하루가 지난 8월 16일이었다. 15일 라디오를 통해 일본의 항복소식을
들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일장기에 푸른물을 들여 태극기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거리에서,광장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몇번이고 조국의 독립을 확인했다.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미군상륙에 대해 일본 경찰은 자신들이 경비를 맡겠다고 나섰고, 통제된 상황을 원했던 미군은 이를 수락했다.


일본 경찰의 저지로 미군환영행렬에 접근할수 있는 시민은 극소수였다. 모든 환영행사을
금지하라는 미군의 지시로.. 인천시민은 외출도 할 수 없었다.

미군을 맞아들인것은 일본경찰이었다.
환영인파가 경계선을 넘으려하자 일본경찰이 발포해 2명이 죽고 9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서울에 도착한 미군행렬을 시민들은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미군의 등장은 반가운일이었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일본에 대한 두려움은 쫓을수없었기때문이다.



이 날까지도 일본군은 총을든체 위협적인 권위를 세우고 있었다.

중앙청앞을 가득메운 시민들에게 미군을 위한 어떤 환영행사도 일본군은 허락하지 않았다.

미군들은 일제가 조선총독부로 쓰던 중앙청 건물앞에 야영을 했다.

9월 9일이 되서야 중앙청의 일장기가 내려졌다.

그리고 성조기가 계양됐다. 미 군정이 개막된것이다.

미군정의 개막은 낯선 그들의 문화도 함께 들여왔다.

소련 여장교의 사인을 받고자 달러를 꺼내는 미군들.. 아직까지 그들은 동지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소련군과 미군이 한반도에서 가진 마지막 평화였다.

일제가 36년동안 이 땅을 지배하는 도구로 사용한 무기들은 미군의 감독아래..일본군이 직접
바다에 수장시켰다.

바다로 가져갈수없는 탱크와 비행기는 폭파시켰다.

폭파작업은 민가근처에서도 진행됐다.

탄압의 상징이던...일본군도 철수했다.
아직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민간인을 포함에 90만에 달했다.


패잔병에 지나지않은 일본군이었지만 이들은 끝까지 오만했다.

이들은 미군에게 패했지.. 우리에게 패한것은 결코 아니라는 태도였다.

일제가 남기고 간것은 군국주의 일본의 찌꺼기 뿐이었고 그 청산은 두고두고 우리의 과제로 남겨졌다.


경성이 당시 가장 유행하던 단어 '자유'가 덧붙여진 서울특별자유시로 개칭됐다.


새로운 조국건설을 꿈꾸는 사람들은 정치에 뛰어들었다. 미군정청에 등록된 정당과 단체에 수는
무려 205개에 이르렀다.

북한은 김일성, 남한은 이승만이 유력한 지도자로 등장한다.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않았기때문에.. 김구는 개인자격으로 귀국해야했다.


전국의 국민학교가 일제히 문을 열었다.

북한에서는 러시아어를..

남한은 영어를 가르쳤다.

제대로된 교실도, 교과서도 없었지만 학생들에겐 모든 것이 새로웠다.


미군을 환영하는 소녀들..


1945년은 반탁시위와 함께 저물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