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일을 회상하며/잃어버린역사를 생각하며

불화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망국의 지름길이되어 우리에게 동아온다.

평암 2008. 7. 28. 14:38

고구려의 운명을 좌우한 형제의 다툼

 
고구려는 660년 백제가 멸망하면서부터 무려 8년간에 걸쳐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고독한 전쟁을 치루어야 되었다.
 특히 당나라는 옛백제땅에 40만명에 이르는 대 병력을 주둔시켰으며, 요동방면으로도 이에 상응하는 병력을 투입시켰다. 여기에 신라군이 약 10~20만 정도가 되었으므로, 고구려는 약 100만 이상의 대 병력과 맞서야만 되었다.

  하지만 고구려로서는 수차례 펼쳐진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많은 전사가가 발생하였으며, 따라서 병력으로는 물론이고 반복되는 청야전술등으로 인해 물자적으로도 매우 열악한 상태에 있었다.
 더구나 667년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사후 단 1년만에, 세아들의 권력다툼으로 장남 연남생이 당나라로 망명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북한의 국보 1호인 평양성; 현재 남아있는 평양성 대부분은 조선 중기 이후 중축된 것이며, 총 연장은 23km정도이다.

 물론 연남생도 막리지(莫離支)에 오르자 마자 국경지역의 여러성을 순찰하는 등 매우 의욕적인 행보를 보였다. 또 이것은 중앙권력유지에만 집착하던 연개소문의 성향과도 차별하된 매우 바람직한 것이었다. 그런데 평양성에 남아있던 남건(男建) · 남산(男産)형제에게 누군가 연남생이 두 동생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니 먼저 계획을 세워야 된다는 이간질을 시작하였다.
 물론 처음에 두 형제는 이런 소리를 믿지 않았다.  그런데 남생에게도 역시 두 형제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내용을 전달하였다.

  남생은 이런 내용을 확인하기위해 친한 사람을 몰래보냈지만, 평양에 남아있던 두 형제가 그를 억류한 후 남생을 소환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남생이 소환에 불응하자 남건이 토벌에 나서게 되고, 남생은 국내성에서 웅거하다가 끝내 당나라로 망명하고 말았다.

 그리고 연남생의 망명이후 확실히 당군은 공격루트부터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당나라는 육로로는 수나라때 개척한 공격로를 줄 곧 고집하였다. 분명 거리상으로는 고구려 도읍 평양으로 갈 수 있는 최단 거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우수한 요새와 정예병이 밀집되어 있었기에 가깝고도 먼 길이었다. 그런데 연남생이 합류한 후로는 이세적(= 이적) 설필하력등을 총관으로 삼아 요동성 대신 신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즉 정면돌파대신 측면돌파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작전은 매우 유호하여 신성이 함락되자 주변 16개성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고 말았다.  연남생의 망명이후 막리지로 임명된 천남건은 아직 신성이 함락되지 않았을 때 5~10만 정도의 지원병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당나라도 충분한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을 뿐더러,  연남생이 당군의 앞잡이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전략과 전술은 무력화 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신성을 구원하기 위해 간 고구려군은 무려 5만명이나 되는 전사자만 낸체 패배하고 말았으며 남소, 목저, 창암의 3성도 함락되고 말았다.
  이러한 당나라의 승정기사에 바로이어 연남생의 군사화 합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천남생이 당군의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아 분명하다.

 그러나 고구려는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았다. 연남건은 다시 고구려 군사를 추수려 압록강 유역에서 당의 대병을 막아냈다. 또한 안시성은 3만의 군대로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당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다만 여기서 삼국사기 기록을 그대로 인용해 보자

 학처준(당군을 이끌고 있던 대장)은 안시성 아래에 있으면서 미처 전열을 가다듬기도 전에 우리 군사 3만명이 엄습하므로 군 내가 크게 놀랐다. 처준은 상에 걸터앉아 말린 밥을 먹다가 정예병을 뽑아 이를 쳐서 무너뜨렸다.

 역시 중국의 일방적인 승리기사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모순이 있다.  3만명이라면 안시성내의 총병력이었고, 이 병력을 무너뜨렸다면 당연히 안시성은 점령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록이 없이 그저 무너뜨렸다는 기록밖에 보이지 않으며, 또 이후 수만이나 되는 당병력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전혀 나와있지 않다.
 결국 천남건의 방어와 안시성의 기습공격에 힘입어 667년은 고구려의 승리로 마감되었다.

 이렇게 당나라 단독의 공격으로는, 연남생의 정보재공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두기 힘들었다. 그러나 과거 약소군이었던 신라는 총 병력 20만 정도의 강대국이 되어 남쪽으로부터 고구려를 지속적으로 압박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668년의 한해가 오고야 말았다. 그 해에는 음력 정월달이 시작되자마자 나당연합군의 총 공세가 시작되었다. 당나라는 이번에도 역시 정면돌파대신 측면돌파를 시도하여 부여성을 점령하고 말았다.

 부여성이 점령되자 인근 40여성도 모두 항복하고 말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고구려는 점점 포위되는 형세에 놓이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고구려 역사 900년이 못되 80살의 장군에게 멸망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지 퍼지고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이것이 마치 오래전부터 예언되오던 비기속의 내용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오히려 당나라와 펼친 수십년간의 전쟁등으로 발생한 참언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아무튼 남건은 부여성을 탈환하기 위해 5만명의 대군을 급파하였지만 설하수 전투에서 이세적장군에게 대패하여 3만명이나 되는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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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성산성 평양시 대성산에 있는 3~5세기에 쌓은 고구려 산성. 성벽 총길이 9284m, 성 둘레 7076m,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정치·군사적으로 매우 중요시되었다

 668년 보장왕 27년 4월에 당나라는 마침내 압록강을 돌파함으로써, 고구려 평양성은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평양성은 한달 이상 항전하였지만, 나당연합군의 맹렬한 공격앞에 결국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건만은  보장왕을 내보낸 성문을 굳게 닫고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그것이 고구려 무사로서 마지막으로 해야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왕이 적군에게 항복선을 한 상황에서, 군사들이 사기가 예전같을 수는 없었다. 당군과 여러차례 전투를 펼쳤지만 그때마다 크고 작은 군사적 손실을 입었고, 남건은 점점 더 자신감을 잃은체 승려 신성(信誠)에게 군사의 일을 위촉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돌이킬수 없는 최후의 실수가 되고 말았다. 물론 그 일이 없었다고 하여도 전황을 반전시킬 수는 없었겠지만 최후의 일전은 펼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성은 남건몰래 이세적과 내통하여 5일 후 성문을 열어주고 만 것이다. 마지막에 남건은 자살을 시도하였지만, 시간은 그 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고구려에 배신한 남생과 보장왕과 함께 항복한 남산은 모두 당나라로부터 벼슬을 받았지만, 남건만은 유배형을 피할길이 없었다.
   그러나 역사에 있어서 연남생은 매국 배신자라는 지울 수 없는 오명을 앞으로도 안고 가겠지만, 남건만은 고구려 최후의 막리지로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고구려 역사를 생각할 때는 항상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역사에 있어서 국가의 탄생과 소멸은 언제나 반복되는 것이지만, 아직 싸울 여력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형제간의 내분이 치명적인 원인이 되어 멸망을 초래하였다는 것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