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상황도는 바로 한국전쟁당시 지평리전투때 중공군에 포위되었던 프랑스대대의 상황도입니다.
너무도 흡사하죠?

그런데 지평리가 어딘지 모르시겠다구요? 바로 요기입니다.

그렇다면 한국판 벌지전투인 지평리전투는 어떤 전투인지 한번 그 개요를 볼까요? 사진으로.

대단한 전과죠?
지도로 보는 한국판 벌지대전투 - 지평리 전투
지도로 보는 한국판 벌지 전투 지평리 전투
가. 지평리 전투가 벌어지기까지의 개황
보통 한국전하면 낙동강 전투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중공군 개입 그리고 백마전투 외에는 잘 모르더군요. 그리고 지평리
전투등의 한국전을 검색해 보면 거의 대동소이하고 대부분 퍼나른 것이고 또한 개별적이라서 일반인들이 전체적인
개괄조차도 모르는 경향입니다. 그래서 저는 퓨전식으로 접근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인천상륙작전후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국군 6사단 청성부대는 압록강의 초산까지 진격하기에 이르렀지요.
사실 인천상륙작전후 전열이 완전히 붕괴된 인민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패주하였습니다. 마치 우리 국군이 전쟁초기의
모습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우리가 통일에 들떠 있을때 바로 중공군이 밀고 내려왔습니다.
나. 1950년 12 전황 ( 유엔군의 급속한 붕괴)
50년 말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 진열은 급속히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전투자체가 없이 중공군의 꽹과리 나팔소리만 들려도 후퇴하기 바빴던 상황이 바로 50년 12월의 상황입니다. 6.25 발발부터 51년 초까지 한국전 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완전한 공격과 완전한 패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련제 T34 탱크 214대를 앞세우고 남침한 당시부터 낙동강 전선이 펼쳐질때까지는 거의 싸움이라는 것이 존재 하지 않을 정도로 한국군은 완전히 패퇴하였습니다. 그 당시 전황을 말하는 실화로는 남침하는 북괴 인민군은 탱크위에서 닭까지 잡아먹어가면서 유유히 진격하였다고 할 정도 입니다.
또 반면에 인천상륙 후엔 북괴 인민군이 완전한 패퇴를 하였습니다. 38선을 넘어 진격한 유엔군과 한국군은 거의 싸움없이 진격하였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또한번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중공군 개입때 였습니다. 불과 한달도 안되어서 중공군은 서울을 점령한 것이 그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속에서 미해병 1사단이 장진호 전투에서 거둔 성과는 중공군을 속부터 골병들게 하고 팽덕회의 작전계획을 송두리채 흔들어 놓은 그런 전투였습니다 미해병 1사단을 공격한 중공군 9병단은 쉽게 전투를 마무리 짓고 서부전선의 13병단과 합세할 계획이었으나 매해병 1사단의 투혼에 막혀서 그 후 작전에 제대로 투입되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미해병1사단이 쉽게 무너져서 중공군 9병단이 13병단 과 쉽게 합류하였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없을지도 모를일이었습니다.

중공군의 진격은 미군의 상상을 초월하였습니다. 그들은 산의 능선을 따라 이동하였고 계곡이나 차량으로 후퇴하는 미군을 포위공격 하기 일수 였습니다. 그바람에 미군은 적의 위치도 가늠하지 못하는 패닉(공황)사태에 바졌고 결국 서울을 포기하였습니다(1.4후퇴)
이 와중에 미8군 사령관이던 워커장군은 전선시찰도중 차량사고고 전사하였고 그 후임으로 부임한 장군이 바로 리지웨이 장군입니다. 위 지도상에 미 해병의 전투지역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장진호에서 철수한 미 해병 1사단이 태백산맥을 타고 넘어온 빨찌산과의 전투지역을 표시한 것입니다. 포항에 본부를 둔 미해병1사단은 전쟁말까지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빨찌산 토벌전을 하였습니다.

다. 벌지전투의 맹장 리지웨이 장군의 부임

워커장군의 교통사고로 인한 전사와 1.4후퇴 그리고 새로 부임한 리지웨이 장군은 전열을 가다듬었습니다. 급격히 떨어진 유엔군의 사기부터 리지웨이 장군은 진작시켰습니다. 그는 2차대전의 명장중의 명장이었습니다. 1편에서 지평리 전투를 저는 한국판 벌지전투 라고 칭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전투의 전개 상황과 지휘관의 면면이 거의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리지웨이 장군은 바로 벌지 전투당시 바스토뉴에서 포위되었으나 끝내 바스토뉴를 지킨 미 101공정사단을 휘하에 둔 공수군단장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부하들에게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공수부대가 언제는 포위되지 않은 적 있나? 우리는 항상 그런곳에서 싸운다.

유럽의 발지 전투
1944년 12월. 유럽의 벨기에 아르덴 숲에선 미군이 처절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에서 유엔군이 중공군의 인해 전술로 생고생을 하였다면 1944년 유럽의 벌지전투에선 독일의 기갑부대의 진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것이 바로 미군이었습니다.
아르덴 숲은 히틀러의 희망이 어린 곳이었습니다. 바로 프랑스의 마지노선을 우회하여 벨기에와의 접경인 빽빽한 숲인 아르덴을 넘어서 서유럽을 석권한 바가 있었지요. 그 것을 재차 노린 것이 바로 벌지전투입니다.


독일의 기갑군단의 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진 전선에서 유일하게 진지를 고수한 곳이 바로 바스토뉴입니다.
1951년 2월 한국의 양평 지평리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무너진 전선에서 진지를 사수한 프랑스대대의
지평리 전투와 바스토뉴 전투는 그래서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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